휘말린 날들
🔖 공포는 전염된다. 그러나 용기 역시 그러하지 않은가?
🔖 친족에 대한 방대한 인류학적 연구들은 사회마다 각기 다른 친족 구조를 관통하는 보편적 공통성이 있다면 그것은 혈연이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속하게 되는, 그래서 서로의 존재에 관여할 수밖에 없는 상호성의 경험이라고 말한다. 누군가의 친족으로 인간은 서로의 삶 속에서 살고, 서로의 죽음 속에서 죽는다. 삶과 죽음을 공유하는 것이 친족 관계의 핵심이라고 할 때, 퀴어 존재가 경험하는 가장 큰 폭력은 이 공통의 영역에서 삶과 죽음을 맞을 자격을 박당하는 것이다. 심각한 손상을 경험한 HIV 감염인의 몸이 살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죽은 듯이 여겨지는 것은 실상 그들의 생명력이 다했기 때문이 아니다. 바로 자신의 일부를 공유하는 타자들이 그의 삶과 죽음에 연루되기를 중단했기 때문이다.
🔖 내가 만난 몇몇 사람들이 감염으로 인해 견뎌내고 있는 이 삶·죽음이라는 기이한 조합은 생명권력의 장치들이 생산하는 폭력의 속성을 알려준다. 동시에 이 시간의 응축을 버텨내고 있는, 끝끝내 자취 없이 사라지기를 거부하는 이들은 여외의 생명력을 발하고 있다. 이 난국에서도 자기 자 신과 타인을 돌보고자 하는 이들의 실천은 강요된 수치와 오명을 부수는 소수자의 힘을 증거한다. 박탈된 존재들 간의 보살핌과 친족 만들기는 존엄한 존재로 살고 죽는 일이 정상성의 특권을 통해서가 아니라 정상성의 경계를 교란하고 뛰어넘는 실천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인간을 인간으로 살아 있게 하는 힘이 도대체 어디서 흘러나오는지를 가늘지만 긴 숨으로 가리키고 있다.
🔖 내재적 낙인이라는 표현에는 큰 오류가 있었다. 낙인의 힘, 낙인을 찍는 힘은 이를 느끼는 개개인에게서 연원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후천성면역결핍중 예방법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이 법의 제 19조 '전파매개행위의 금지'가 설정한 바에 따르면, 감염인은 마땅히 무얼 하는 게 죄가 되는지를 잘 알고 있어야 한다. 수치심, 죄책감, 자책, 벌을 받아야 한다는 느낌은 이 법과 법이 반영하는 사회 질서가 그것의 생성을 정확히 목표하고 있는 감정의 양식이다.
(...) 이 법에 따르면 감염이라는 나쁜 사태와 그에 따른 공중 보건의 위기에 대한 책임은 마땅히 감염한 사람들에게 먼저 물어야 하는 것이다. 언제든 심문받을 수 있는 자리에 놓일 때, 수치심과 부끄러움, 자기혐오는 이를 느끼는 주체, '나'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 자리에서 놓여날 수 없는 나를 덮쳐 오는 것이다.
🔖 생각이 언어를 오염시킨다면, 언어도 생각을 오염시킬 수 있다. - 조지 오웰, 「정치와 영어Poltics and the English Language」(1946).
🔖 개념과 개념의 연결을 이루는 말의 매듭을 되짚어보면 감염병의 유행이 공동체라는 형식에 내재적이라는 점을 보다 명확히 이해할 수 있다. 감염병의 유행은 공동체를 이룰 때 반드시 생겨날 수밖에 없는 취약성의 한 속성이며, 따라서 이 취약성을 구성하는 가장 기초적인 단위는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이다. 이는 각 개인이 어떤 실천을 하느냐와 무관하게 질병의 유행은 일어나고야 말 거라는 책임 무용론이 아니다. 감염병 유행이라는 현상의 속성에 부합하는 책임의 속성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를 보다 면밀히 사고해야 한다는 뜻이다. 능동태와 수동태의 대립을 기반으로, 개인을 단위로 두고 감염병 유행에 대한 책임을 구성할 때, 실제 그 작용의 원인과 과정, 효과에 응당한 대책을 적절히 구성하기 어렵다. 다시 말해 각 개인은 감염병 유행에 응답할 능력으로서 책임성을 홀로 발휘할 수 없다. 문제를 일으켰다고 가상적으로 규정하고, 그에 따라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결함을 찾아내고, 처벌하고, 쫓아내고, 고립시키고, 권리를 박탈하고, 오래 고통받게 할 수는 있지만, 이 모든 일은 유행이라는 공동체적 작용을 멈추게 하지도, 그 작용이 야기하는 위해를 줄이거나 없애지도 못한다. 감염병 유행에서 책임의 단위는 공동체이다. 함께 겪어내 서로의 필요에 응답하는 것, 그것이 유행이 요구하는 책임의 요체이다.